이곤 (19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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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곤은 1919년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며, 흥영군 이우의 동생이다. 1951년 사기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국회 수위로 근무했으며, 1969년 홍릉 내 거주지 철거 과정에서 문화재 관리 직원과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1974년 국회 경비직에서 퇴직 후, 1984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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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곤 (1919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이곤 |
원래 이름 | 李錕 |
아명 | 이명길(李銘佶) |
출생일 | 1919년 1월 3일 |
출생지 | 서울특별시 |
사망지 | 서울 |
사망 원인 | 병사(교통사고 후유증) |
배우자 | 황경생(黃庚生) |
자녀 | 이준(장남) 이양(장녀) 이기(차녀) 이제(삼녀) |
아버지 | 의친왕 이강 |
어머니 | 의친왕비 김씨(적모) 수인당 김씨(생모) |
친인척 | 이건(이복 친형) 이우(동복 친형) 이해원(이복 누이동생) 이해경(이복 누이동생) 이석(이복 남동생) 이구(사촌 남동생) |
2. 생애
1919년 한성부(현재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준용의 양자가 된 흥영군 이우는 그의 친형이다.
1952년부터 구황실재산관리국(현 국가유산청)의 허가를 얻어 1962년까지 덕수궁에서 거주했다. 1951년 토건업자 등과 공모해 인장을 위조, 명동 소재 옛 이왕실 소유 토지와 주택을 에 매각했다가 사기 혐의로 체포되었다.[1] 징역 3년을 구형받았으나 6.25 전쟁 전까지 국가에서 지급한 보조금을 받지 못해 생활고를 겪고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2]
1964년 황호현 국회의원의 주선으로 국회 수위로 취직했다. 그전에는 문교부 과학기술과 촉탁, 석탄공사 청량리지사 경비원 등 말단직을 역임하였다. 광복 후 칠궁(궁정동 1-1)에 거주했으나 한국 전쟁으로 피난 갔다 돌아와 1954년부터 덕수궁에 거주했다. 1962년 덕수궁 개축 때 집이 헐려 서울 청량2동 205번지 홍릉 내 마굿간을 개조해 2250KRW을 내고 살았으나,[4] 영휘원 정비 계획에 따라 퇴거 요구를 받았다.
이 와중에 문화재 관리국 산림보호직원 한경숙과 다툼이 벌어졌다. 이곤은 한경숙이 “왕족이면 다냐, 나가라”라는 폭언과 집안 기물을 부숴 다투다가 전치 4주의 부상을 입었다며 고소했고, 한경숙도 이곤으로부터 폭행당해 전치 2주의 부상을 입었다고 맞고소를 제기했다. 결국 둘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쌍방 입건되었다.[5]
1969년 4월 23일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은 홍릉 내 이곤의 집을 철거 조치했다. 문화재관리국은 철거 전 7번이나 경고장을 보냈으나 이곤은 이사 자금이 없다며 불응해 왔다. 철거 후 홍릉 내에 천막을 치고 거주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6] 1974년 국회사무처 경비직에서 퇴직했다.
2. 1. 생애 초반
1919년 한성부(현재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준용의 양자가 된 흥영군 이우는 그의 친형이다.1952년부터 구황실재산관리국(현 국가유산청)의 허가를 얻어 1962년까지 덕수궁에서 거주했다.
1951년 토건업자 등과 공모해 인장을 위조, 명동 소재 옛 이왕실 소유 토지와 주택을 에 매각했다가, 사기 혐의로 체포되었다.[1] 징역 3년을 구형받았으나 6.25 사변 전까지 국가에서 지급한 보조금을 받지 못해 생활고를 겪고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을 언도받고 풀려났다.[2]
2. 2.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52년부터 구황실재산관리국(현 국가유산청)의 허가를 얻어 1962년까지 덕수궁에서 거주했다.1951년 토건업자 등과 공모해 인장을 위조, 명동 소재 옛 이왕실 소유 토지와 주택을 에 매각했다가 사기 혐의로 체포되었다.[1] 징역 3년을 구형받았으나 6.25 전쟁 전까지 국가에서 지급한 보조금을 받지 못해 생활고를 겪고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2]
2. 3. 공무원 생활과 말년
1964년 황호현 국회의원의 주선으로 국회 수위로 취직했다. 그전에는 문교부 과학기술과 촉탁, 석탄공사 청량리지사 경비원 등 말단직을 역임하였다.광복 후 칠궁(궁정동 1-1)에 거주했으나 한국 전쟁으로 피난 갔다 돌아와 1954년부터 덕수궁에 거주했다. 1962년 덕수궁 개축 때 집이 헐려 서울 청량2동 205번지 홍릉 내 마굿간을 개조해 2250KRW을 내고 살았으나,[4] 영휘원 정비 계획에 따라 퇴거 요구를 받았다.
이 와중에 문화재 관리국 산림보호직원 한경숙과 다툼이 벌어졌다. 이곤은 한경숙이 “왕족이면 다냐, 나가라”라는 폭언과 집안 기물을 부숴 다투다가 전치 4주의 부상을 입었다며 고소했고, 한경숙도 이곤으로부터 폭행당해 전치 2주의 부상을 입었다고 맞고소를 제기했다. 결국 둘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쌍방 입건되었다.[5]
1969년 4월 23일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은 홍릉 내 이곤의 집을 철거 조치했다. 문화재관리국은 철거 전 7번이나 경고장을 보냈으나 이곤은 이사 자금이 없다며 불응해 왔다. 철거 후 홍릉 내에 천막을 치고 거주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6] 1974년 국회사무처 경비직에서 퇴직했다.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조부 | 고종 | 조선 제26대 국왕 |
조모 | 귀인 장씨 | 후궁 |
부 | 의친왕 이강 | |
친모 | 수인당 김씨 | 김흥인의 딸, 측실 |
부인 | 황경생 | |
장녀 | 이양 | |
차녀 | 이기 | |
삼녀 | 이제 | |
장남 | 이준 | |
며느리 | 김성자 | |
손자 | 이범 | |
손자 | 이백 | |
형 | 이우 | 영선군 이준용에게 출계 |
형 | 이주 | 인평대군파 이인용에게 출계 |
참조
[1]
웹인용
代書料(대서료)만十萬餘圜(십만여환)
https://newslibrary.[...]
2024-10-27
[2]
뉴스
전락의 왕손갱생의 출감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53-07-22
[3]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24-10-28
[4]
뉴스
갈 곳 없는 왕가의 후예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68-06-06
[5]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24-10-31
[6]
뉴스
의친왕 아들 곤씨 가족 길가에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69-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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